빈 서판 (스티븐 핑커) - 학문의 금기를 깨라

Posted 2004/07/31 00:40, Filed under:
우리는 잘못된 과학적 지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비극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이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근거로 한 판단들은 옳은 것일까요? 담배가 태아에 나쁘다는 사실은 남자보다 여자의 흡연이 더 금지되어야 할 이유가 되나요? 전자파가 태아에 나쁘면 임신한 여성은 컴퓨터로의 접근이 제한되어야 할까요? 여자가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수리적 능력이 낮다면 여학교의 이공계 학급 수는 적어야 할까요? 생물학적으로 일부다처가 일부일처보다 유리하다면 우리 사회도 일부다처제를 권해야 할까요?


예전에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라는 책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질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빈 서판]이란 대단히 두꺼운 책을 읽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결정되는지 아니면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지가 중요한가? 저자에겐 그렇다. (나에겐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옳은 과학적 지식은 반드시 옳은 가치 판단으로 연결되는가? 저자는 꿋꿋하게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강력 동의했다)

저자는 인간에겐 선천적인 (유전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별 재능의 차이도 있고, 남녀 간의 차이도 있다. 질병, 성격, 취향, 범죄 성향에도 선천적인 차이가 있다. 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많은 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파시스트, 인종 차별주의자, 편협한 남녀 차별주의자, 그리고 고착화된 사회 계급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의 딱지가 붙어 사회에서 매장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무려 900쪽(부록은 제외하면 760쪽)인 것이다. 마침표를 찍기 전에 아예 남들의 입막음까지 끝내버리려고.

이 시대에 선천적인 본성을 말한다는 것은 금기이다. 그것이 인종 청소를 정당화하고, 남녀 차별을 고착시키며, 때론 강간을 정당화하거나 범죄자를 영구히 낙인찍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감히 그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환경의 영향을 입증하기 위해서 갖가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우물 안을 뺑뺑 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환경의 영향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는가? 아니다. 저자는 신경학과 심리학의 최근 성과들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증거들이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래, 선천적인 거야!

만약 그게 옳다면 뭐가 문제인가? 이젠 금기를 해제해야 한다. 유전자인지 환경인지 논의할 수 있도록 “감히 생각조차 못했던” 금기의 영역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열심히 설명한다. 차이가 있다고 차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적인 상태에서 폭력과 착취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폭력과 착취를 계속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에 선천적인 영향이 있다고 해도 그 책임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가 유전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유전자의 꼭두각시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천성-후천성 논쟁이 어느 쪽으로 귀결되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하자. 만약 지장이 있는 연구 결과라면 세상에 내놓지 말아야 할까? 순수한 학문적 연구라도 세상에 미치는 파급 효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구자는 자신의 결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핵폭탄은 안 만들면 그만 이라지만 연구 결과에서 파급효과가 우려되는 것을 제거하고 내놓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은폐/왜곡 아닌가? (다윈이 자신의 연구가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파생시킬 것을 알았다면, 그 연구를 은폐해야 했나?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는 여성에게 불리한 연구 결과를 은폐해도 되는가?)

이 책의 장점은 두꺼운 값을 한다는 것이다. 선천성-후천성 논쟁에 관련하여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는 모두 언급되어 있고, 그에 대해 답변이 되어 있다. (충분히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역시 두께의 압박, 저자가 친절하다 해도 어지간하면 권하고 싶지 않다.

★★★★★

2004.7.30. 닭의비행.

빈 서판 -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가
스티븐 핑커 | 사이언스 북스 | 4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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